음악이나 그림의 인연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데요.
운보 김기창 선생님과의 인연은 좀 독특합니다.
종영한 지 한참 후 보게 된 드라마(ㅎㅎ하얀거탑) 속에서 '바보산수화' 가 뇌물로 등장하는데요.^^
이름도 독특했지만 스쳐지나가는 장면 속 벽에 걸린 그림의 잔상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작가와.. 작품 정청(靜聽)입니다.
오늘은 작가 운보 김기창과 그분의 그림 정청을,
손철주 선생님의 책을 참고하여 설명하겠습니다.
- 운보와 소제의 만남
운보가 열아홉 되던 가을,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운니동의 집 건넌방에 모녀가 세를 들어옵니다.
딸의 이름은 이소제.
이제 갓 15살이나 되었을까요. 볼이 유난히 발그레한 소녀였습니다.
"하필 폐앓이를 하는 여자가 들어오다니, 게다가 기생이라고? 딸까지 낯빛이 신통찮아."
할머니는 손자 운보의 눈길이 소제에 닿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듣지 못 하는 화가와 기생 딸 소제.
소제는 운보의 손발이 되어
늦은 밤까지 작업한 운보를 대신해 물감통을 비우고 정성스레 붓을 씻었습니다.
- 운보와 소제.. 그리고 어머니
운보는 이마의 땀을 닦아주던 소제의 옷고름에서 돌아가신 어머님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단 한 번의 기침에 핏빛으로 물든 그녀의 입술을 보게 되었으며,
먼 훗날까지 그녀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1934년 초봄.
행여라도 소제의 기침이 손자에게도 옮길까
노심초사하시는 할머니의 눈을 피해
기침이 잦아진 소제와 막내 누이 기옥을 데리고
운보는 몰래 집을 나섰습니다.
이미 운보에게 소제는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소제를 통해서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리라.'
그날 소제와 누이, 운보가 찾은 곳은
잘 꾸며진 의사의 응접실이었습니다.
축음기의 음악은 정적 속에 녹아들고
쥘부채로 앞섶을 가린 채로 앉아 있는 소제.
운보가 붓을 뗄 때까지 내내 꼼짝도 하지 않았던 소제.
운보는 그제서야 소제가 한 번도 기침 소리를 내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 첫사랑의 각혈, 작품 정청(靜聽)
작품 정청(靜聽)은 그렇게 완성되었습니다.
그 뒤 정청이 선전 입선작이 된 소식에도 운보는 그 소식을
소제에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발표가 나기 전 운보의 집을 떠난 소제.
이듬해 가을, 어머니를 여읜 그날처럼 운보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옷고름에 피를 쏟고 죽은 소제의 이야기를 들은 날이었습니다.
*정청(靜고요할 정 聽들을 청)
운보는 소제를 바라보며 고요히 무엇을 듣고 보았을까요..
귀머거리 소년 화가에게 어머니였던 소제.
그리고 그의 작품 정청(靜聽)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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