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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 개념 어휘/시저 생애. 아카데미학파.피타고라스학파. 소요학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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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시저의 생애와 아카데미학파, 피타고라스학파, 소요학파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시저의 생애와 함께 업적을 살펴 보고 아카데미학파 피타고라스학파 소요학파의 특징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시저의 생애 생애 업적

시저(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경에 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로마에서 전통 있는 귀족가문이었지만 세 명의 집정관만 배출한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시저와 같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저라는 이름을 가진 법무관이었으며 속주의 총독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집안은 역사가 있는 집안이며 집정관이 있었습니다.

 

 

 

시저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데요. 다만 기원전 85년에 아버지가 죽고 그는 16세의 나이로 가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해에 시저는 주피터 신의 고위 사제로 임명되었고 킨나(로마 공화정의 정치가)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했습니다.

 

 

 

폭군 술라가 권력을 잡자 그의 숙청에서 도망친 시저는 기원전 81년에 소아시아의 속주 미누키우스의 수하에 입대했습니다. 기원전 78년에 술라가 죽고 로마로 돌아온 후에 시저는 31세의 나이로 재무관에 임명되어 비로소 로마에서 공직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69년에 아내 코르넬리아가 죽고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와 재혼했습니다. 기원전 65년에 안찰관이 되었고 곧바로 법무관이 되었지만, 나내의 불륜으로 인해 이혼하고 히스파니아 올테리오르(지금의 스페인 북부, 동부, 중남부 지역)속주의 총독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시저는 집정관에 당선되기 위해서 폼페이우스와 손잡고 폼페이우스의 경쟁자인 크라수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 세명에 의해서 1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에 당선되었으며 삼두정치의 약속에 따라 농지법을 개혁, 카토와 키케로를 제압하고 원로원을 약화시켰습니다.

 

 

 

아카데미학파

아카데미는 기원전 4세기경 플라톤의 철학 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혜의 신 아테네에게 바쳐진 고대 아테네 외곽의 올리브 언덕을 칭하는 것이며 철학 공부를 위해서 만들어진 플라톤 학교입니다. 고대 철학에서는 흔히 플라톤 학파나 플라톤의 제자들을 가리키키도 했습니다. 이 학교가 언제 건립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체로 오늘날 학자들은 기원전 380년 중반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아마도 플라톤이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돌아왔다고 믿어지는 기원전 387년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 이곳은 김나지움 근처에 있는데 플라톤이 상속받은 사유지였습니다.

 

 

 

아테네에서 아카테미까지는 1마일 정도 된다고 합니다. 아카데미 학교는 공립이 아니었지만 최소한 플라톤의 생존 당시에는 수업료는 받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수업하는 과목들은 증거는 없지만 플라톤의 작품들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수학이나 철학 등이었습니다.

 

 

 

플라톤 추종자들은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철학을 금지하고 이 학교를 폐쇄하기까지 거의 900년간 아카데미에서 만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플라톤 철학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천을 겪었지만 아카데미는 플라톤 철학의 모든 학파를 아우르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친 아카데미학파는 보통 세 단계로 구분됩니다. 대체로 플라톤과 그의 계승자 들고 대표되는 기원전 250년경까지를 구 아카데미라 하고 회의주의를 수용했던 기간을 중기라고 부르는데 기원전 150년경까지입니다. 신 아카데미학파는 기원전 110년경 필로에 의해서 대표됩니다. 

 

 

 

이후에는 아카데미 학파에 대해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는데요. 그러다가 로마 시대에는 플라톤주의가 다시 나타나는데 이 시대에 플라톤의 철학은 프로클루스의 지도하에 신플라톤주의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아테네에서 신플라톤주의 가르침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프로클루스는 아테네에 와서 아카데미에서 시리아누스가 가르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아테네에 있던 신 플라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플라톤의 계승자로 부르면서 자신들의 전통이 플라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원래의 아카데미와 지리적, 제도적, 경제적, 개별적인 연속적인 존재한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다시 부활한 마지막 그리스 철학자들은 대체로 다양한 지역 출신으로 헬레니즘의 문화적 배경을 가집니다. 아가티아에 의해서 명명된 7명의 아카데미 회원 중 5명은 시리아 문화권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29년 그 학교를 닫아버렸고 선플라톤주의 학자들은 동방으로 망명했습니다. 아카데미의 마지막 학자는 다마스카우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망명 중에 있었던 중요한 신플라톤주의 문하생들은 최소한 10세기까지는 지속했고 동방 지역들이 이슬람 군대에 의해서 정복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 이슬람권에서 플라톤 철학이나 과학 문헌들을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피타고라스학파

피타고라스학파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에 의해서 주창된 형이상학적인 학파를 말합니다. 피타고라스는 기하학에서 피타고라스의 원리로 잘 알려져 있는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그리스의 사모스에서 태어났습니다.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6세기경 남부 이탈리아 크로톤에서 피타고라스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당시 피타고라스 공동체의 멤버들은 정치적으로도 영향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적대적인 귀족들의 당파에 공격을 받아 구성원들은 죽임을 당하면서 공동체는 해체되었습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과학과 종교, 즉 대체로 피타고라스에 의해 시작된 수학과 과학의 연구를 확대하고 발전시킨 부류와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부분에 집중했던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 피타고라스는 영혼은 불멸이며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고, 사후에 다른 몸으로 윤회하는데 도덕적 정결의 삶을 통해서 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느냐는 영혼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이성적이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진리를 진지하게 탐구했을 뿐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전체적 생활 방식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철학이기보다는 마치 신비적 종교적 집단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수행에 필요한 많은 규율들이 있었으며 또 그리스 민간 신앙의 구전에서 유래하는 갖가지 금기들도 있었습니다. 우주의 생명은 동물이나 식물 안에 나타난다고 여겨졌으며, 피타고라스는 매 맞는 개의 부르짖음에서 죽은 친구의 음성을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피타고라스학파의 가르침에는 엄격한 섭생이나 다이어트에 대한 규율이 있었습니다.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섭생이 필요합니다. 그 섭생은 콩과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와 금욕주의적 다이어트입니다.

 

 

 

수학적으로 피타고라스학파는 수학 연구에 기초해서 수와 자연과의 신비적인 관계를 통해서 수학적인 우주론을 형성했습니다. 피타고라스팍파는 우주는 유한과 무한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아름다운 전체의 조화로서 만물은 수로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수의 비례를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중심이 있고 그 중심에는 불이 있으며 해와 달과 지구와 반지구 등의 구체가 그 중심을 돌고 있다고 믿는 독특한 우주론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피타고라스는 숫자 1,2,3,4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네 숫자의 합이 10이고 이것은 수의 전체적 본질을 내포한다고 믿었습니다. 또 1,2,3,4에서 1은 점, 2는 선, 3은 면, 4는 입체를 이룬다고 보았고, 1,2,3,4의 수만큼 차례로 각 줄에 점을 찍으면 각 변이 4인 정삼각형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에도 기여를 했습니다. 피타고라스 음계가 그것입니다. 예를 들면 1옥타브는 1:2, 5도는 2:3, 4도는 3:4 같은 배율에 관한 것입니다. 기원전 5세기 경에는 그의 제자들이 그리스 음악 이론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습니다.

 

 

 

 

소요학파

소요학파는 고대 그리스 철학교의 회원들을 지칭해서 부르는 말로 '걸어다니다, 돌아다니다'라는 그리스어의 번역에서 나온 말입니다. 소요학파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서 파생된 말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걸어 다니면서 강의를 하던 관습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아카데미를 떠나 여행을 하다가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서 리케이온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소요학파의 관계는 플라톤과 아카데미학파와의 관계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요학파는 학교라고 하기에는 어느 정도 비공식적이어서 강의안이나 학비와 같은 요구는 없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강의도 했으며 다른 구성원들의 철학이나 과학적 연구들도 공동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만들어진 많은 내용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으로 전해졌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이 여러 분야에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서기 529년 유스티니아누스가 고대 철학을 금지한 수로 많은 학자들이 동방으로 이주했고 이슬람권에 많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소요학파의 교리들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원리는 플라톤과는 대립하는데, 플라톤이 주로 형상에서 출발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주로 경험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은 과학적 연구와 유사합니다. 즉 경험을 통한 귀납적 방법으로 많은 사실에서 시작해 보편자에게로 결론을 찾아갑니다. 

 

 

 

기원전 80년대쯤 로마의 술라라 아테네를 무자비하게 약탈하여 아테네의 모든 학파들은 거의 중단되었고 리케이온은 거의 제 기능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술라는 소요학파에 생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술라 장군은 아리스토텔레소의 저작들을 로마로 가져갔고 그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의 기초가 된 아리스토텔레스 작품 모음집이 안드로니쿠스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신 플라톤주의자에 따르면 안드로니쿠스는 소요학파의 열한 번째 학자로 불립니다. 초기 소요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확장하는 데 관심이 많았지만 안드로니쿠스 이후로는 변호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로마시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인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더를 들 수 있습니다. 또 6세기에 심플리키우스나 보에티우스를 들 수 있습니다. 이후 소요학파는 서방에서는 사라지고 초기 이슬람 철학이 병합되었습니다. 12세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해서 서서히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스콜라 철학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상 시저의 생애와 아카데미학파, 피타고라스학파, 소요학파에 대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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