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으레 떠오르는 음식들이 있는데요.
저는 포슬포슬 감자가 넉넉히 들어간 수제비가 생각납니다.
(얇게 뜯어낸 반죽의 수제비는 천상의 맛^^)
오늘은 수제비의 유래와, 귀한 음식이었던 수제비가 어떻게 서민음식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수제비의 유래
수제비는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전해졌다고 추정되고 있는데요.
중국의 농업기술서인 '제민요술' 에 나오는 박탁이
오늘날 우리가 먹는 수제비의 모습입니다.
손을 의미하는 '수(手)', 접는다는 의미의 '접'이 합쳐저 '수접이'에서 비롯되었는데요.
이 수제비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한자어로는 박탁, 북한에서는 뜨더국, 던지기탕이라 부릅니다.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뜯어내서 요리를 하면 수제비,
면을 뽑아내면 칼국수인데요.
그래선지 국수 반죽을 직접 만드는 음식점에서는 수제비를 함께 파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제비의 종류는 지역과 재료에 따라 다양한데요. 명칭 또한 달라집니다.
경 남 : 수지비, 밀제비, 밀까리 장국
전 남 : 떠넌죽, 띠연죽
전남 여수시, 경북 봉화군 : 다부렁죽, 벙으래기
경기도, 강원도 : 드데기, 뜨더국
귀한 음식이었던 수제비, 어떻게 서민음식이 되었을까요?
요즘에는 별식으로 즐기고 있지만 예전에는 구황 음식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 전으로 내려가면 귀한 대접을 받는 음식이었습니다.
'고려도경'에 기록된 바를 살펴보면 "밀이 적기 때문에 중국에서 수입한다.
그러나 밀가루 값이 비싸서 혼인날이나 잔칫날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
"고려시대부터 먹기 시작했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의 주식은 쌀과 보리였으며
또한 우리나라의 토양이 밀을 재배하기에는 맞지 않아
밀 수확량이 극히 적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서 수입해오는 사치품이었습니다.
이때 서민들도 수제비 비슷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요.
단, 밀의 대체품인 메밀가루 등을 이용해서 만들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양반들 간의 접대 요리나,
특별한 날에만 먹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민음식이 되었을까요?
6.25 전쟁 이후 미국이 밀가루를 구호물자로 무상원조하면서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1960년 대 중반 정부가 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펼친
분식 장려 운동 때문에 서민들의 주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 중에서
지금도 수제비는 쳐다보기도 싫다고 손사래를 치는 분들이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수제비에 관련된 속담이 있어서 정리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국수 잘 만드는 사람이 수제비도 못할까?
- 이는 어떤 한 가지에 능숙한 사람은 그와 비슷한 다른 일도 잘한다는 뜻입니다.
이상 수제비의 유래와 수제비가 어떻게 서민 음식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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