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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한시] 신사임당의 그림 초충도와 초서, 한시 사친과 유대관령망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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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문인이었던 신사임당의 일대기와 그림 초충도와 초서 병풍,

그리고 한시, 사친(思親)과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을 설명하겠습니다.

 

 

- 조선시대 대표 여류 문인, 신사임당.

 

조선 중기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난 신사임당.(1504년 12월 5일-1551년 6월 20일)

아버지 신명화, 어머니 용인이씨로 사온의 딸, 배우자 이원수, 자녀 4남 3녀 중 맏딸 이매창과 율곡 이이가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신인선입니다.

신사임당이 7살 때 외할아버지가 주신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똑같이 그려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화가 있는데요.

실제 포도화와 산수화의 실력이 뛰어나서

안견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오만원권 지폐 앞면에도 신사임당의 초상화와 포도 그림이 그려져 있지요.^^

 

 

신사임당의 초충도,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신사임당의 초충도, 출처-한국한중앙연구원

 

 

- 신사임당의 화풍과 초충도(신사임당초충도병, 8폭의 초충도)의 특징. 

 

1. 당시 화가들이 화려하거나 강한 장미, 작약, 모란, 호랑이, 소, 고양이 등의 소재로

과장이 심하거나 비현실적인 그림들을 그릴 때,

신사임당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그렸습니다.

 

 

2. 초충도에 개달개비, 물봉선화,쑥부쟁이, 맨드라미 등 소박한 꽃들을 그렸으며,

들쥐, 도마뱀, 쇠똥벌레 등 소소한 동물과 곤충들을 함께 그렸습니다.

또한 오이, 가지 등 채소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는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며,

주위에 있는 사소한 것들과 나눈 정서적 교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또한 그림을 그릴 때는 아주 단순하게 사물을 배치했는데요.

그 단순함이 오히려 품격을 끌려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초충도를 그릴 때 중앙에는 식물을 그리고

땅에 해당하는 부분을 1/3 정도의 비율로 나누어

식물 주위로 동물과 곤충을 그렸습니다.

땅 위에 기어가는 개미까지 그려 넣은 것으로 보아

세심한 관찰력을 지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초충도가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볕에 말리자,

닭이 와서 산 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 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5. 현재 채색화, 묵화 등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작품도 수십점이 있습니다.

 

* 명종 때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 하며 격찬을 했습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신사임당의 초충도,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 신사임당의 서풍과 초서 여섯폭 병풍.

 

'신사임당초서병풍'은 신사임당이 당시 오언절구를 초서로 쓴 6폭 병풍이다.
단정한 점획, 긴밀한 짜임, 곡선과 직전의 원만한 조화 등이
돋보이는 신사임당의 전형적 초서이다.
1873년 7월 31일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강릉시 오죽헌 율곡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총 8폭 중 수가 1폭-6폭
병풍 말미의 2폭은 발문이다.
세로44.2cm, 가로 33.5cm 크기의 닥나무 종이에
오언절구 6수가 초서로 적혀 있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참고)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습니다.

1868년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후세에 남기고자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한 후 발문을 적었습니다.

발문 내용은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 고 격찬했습니다.

 

또한 초서이지만 해서와 같은 차분한 서풍을 보입니다.

 

신사임당의 초서 여섯폭 병풍,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사임당의 초서 병풍 중 일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사임당의 초서 병풍 중 일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신사임당의 한시 사친(思親)과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이따금 블로그 내에서 한자가 인식이 안 되는 관계로 원문은 제외하고

한글본만 올리겠습니다.)

 

 

◈ 사친(思親, 어버이를 그리워함)

 

천 리 고향은 만 겹의 봉우리로 막혔으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길이 꿈속에 있도다/

한송정 가에는 외로운 보름달이요/

경포대 앞에는 한 바탕 바람이로다/

모래 위엔 백로가 항상 모였다가 흩어지고/

파도머리엔 고깃배가 각기 동서로 왔다 갔다 하네/

언제나 임영 가는 길을 다시 밟아/

비단 색동옷 입고 슬하에서 바느질할까?

 

* 신사임당이 서울에 시집와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입니다.


◈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늙으신 어머니를 강릉에 두고/

외로이 서울을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평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신사임당이 저 멀리 북평촌에 두고 온 어머니 생각에 복받친 마음을 담은 시입니다.


- 신사임당의 든든한 조력자, 남편 이원수 그리고 자녀 이이.

 

신사임당이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녀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유년시절의 좋은 환경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편상이 아니었던

이원수를 만났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실제 신사임당의 능력을 복돋아줄 배우자를 염두에 두고

신사임당의 부친인 신명화가 고르고 고른 데릴사위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남편 이원수는 그녀의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출가 후에도 그 당시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습니다.

또한 긴 시간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시어머니의 덕도 컸습니다.

남편 이원수는 신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재능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신사임당의 자녀들 중 셋째 아들 이이는 어머니의 행장기를 저술했는데요.

이를 통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전품, 정결한 지조, 순효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습니다. 

 

 

이상 신사임당의 그림 초충도와 한시 사친, 유대관령망친정에 대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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